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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리끼리 문화 이해하기

20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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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리끼리 문화 이해하기

 

박숙영


끼리끼리 문화와 사회적 고통

아이들은 학기 초부터 ‘관계 맺기’에 촉각을 세운다. 친구가 있고 없고에 따라 아이들에게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 그러다 학기 중간쯤 되면 아이들 사이에 끼리끼리 어울리는 문화가 생겨서, 교실은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게 된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가까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관계성을 좀 더 들여다보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그리 높지 않다. 아이들을 연결하게 하는 힘은 서로에 대한 신뢰보다는 홀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홀로 급식을 먹으러 다녀야 하거나 홀로 교실에서 맴돌게 될 것이 끔찍하고 두려운 것이다.

인간은 이런저런 형태의 사회적 거부나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번에 걸쳐 관계 단절의 경험을 피할 수 없는데, 특히 자신이 상대를 버릴 때보다 상대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 더욱 쓰라린 고통을 느낀다. 사회심리학자 매튜 D. 리버먼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사회적 연결에 대한 위협을 신체적 고통을 경험할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경험하도록 진화했다.” 사회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은 신경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그룹에도 소속하지 못했다고 여길 때 본능적으로 신체적인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다.

 

사회적 연결은 인간의 생존 욕구다.

매튜 D. 리버먼은 “사회적 적응은 우리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종이 될 수 있었던 핵심 이유”라고 말한다. 인간의 생존과 인류의 발전은 경쟁과 투쟁보다는 협업이 더 중요했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 사회적 연결과 협업을 위해 우리의 뇌와 신경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잘 돕도록 발달해 왔다. 인간만이 얼굴을 붉히는 능력을 갖추었는데, 얼굴을 붉히는 것은 전형적인 사회적 형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설에 의하면 인간의 일차적 욕구에 해당하는 것은 음식, 물, 수면과 관련된 생리적 욕구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유아기를 생각해 보면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지원과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 즉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사회적 지원이 먼저 충족되어야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매튜 D. 리버먼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은 생존을 위해 사회적 연결을 갈망하도록 구성되어 있고,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로 본다면 사회적 욕구는 오히려 가장 아래 단계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사회적 연결, ‘관계맺기’는 인간에게 이차적 욕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공감empathy과 끼리끼리 문화의 배타성

인간이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감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은 ‘공감은 상대에게 주목하고, 상대와 함께 느끼고, 상대를 돕기 위해 행동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타인과 공감할 때 각자의 뇌에서 동일한 신경 회로가 활성화된다. 우리의 거울 신경이 동기화되면서 말없이도 소통한다. 공감에는 공격적 행동을 유발하는 뇌 부위인 아미그랄다 편도체를 침묵시키는 힘이 있어서 타인을 잔인하게 대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학급의 끼리끼리 문화도 모두 공감 능력 덕분이다. 그런데 끼리끼리 어울리는 문화를 관찰해보면, 누군가를 잘 끼워주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된다. 다른 무리와 보이지 않는 긴장감과 경계선도 존재한다. 아이들은 친밀감 형성을 위해 뒷담화를 한다. 이런 배타적인 모습은 내적 결속력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또 우정과 의리를 같은 의미로 여긴다. 그래서 무리 간에 갈등이 발생하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보다 무조건 같은 무리의 편을 들어준다.

공감 능력이 있는 그들이 왜 타인들에게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까? 심지어는 악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들은 왜 일어나는 걸까?

 

공감은 스포트라이트다.

최근 공감에 대한 반전을 주장하는 심리학자가 있는데, 《공감의 배신》의 저자 폴 블룸이다. 그는 공감의 어두운 메커니즘을 조명하였다. 공감은 가까운 사람들, 즉 우리가 냄새를 맡고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제한된 기술이다. 이런 의미로 블룸은 공감을 스포트라이트에 비유한다. “공감은 세상을 비추는 선한 태양이 아니다. 스포트라이트, 즉 집중 조명이다. 또한 그것은 당신의 삶에서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을 골라내고, 당신이 그 한 줄기 빛에 가득 담긴 감정을 모두 빨아들이느라 바쁜 동안 나머지 세상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네덜란드 사상가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이러한 공감의 특성으로 인해, 같은 소속집단끼리는 강한 유대감을 느끼지만 낯선 타인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 옛말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 말이 있다. 공감은 같은 소속집단 간의 정서적 유대감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공감 능력 자체가 이성적 판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끼리끼리 문화를 넘어설 수는 없는 걸까? 그들의 공감 능력이 학급의 모든 구성원에게로 확장될 수는 없을까?

 

공감empathy에서 연민compassion으로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공감을 연민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의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공감은 감정 소모를 불러와 탈진하게 한다. 더불어 감정 소모는 우리 시야를 좁게 하여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게 한다. 타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는 공감 대신,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타인을 향해 따뜻함과 배려, 보살핌의 감정을 불러오면 오히려 고통스럽지 않고 상대방을 지원할 힘이 생긴다. 이것이 연민이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공감은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연민은 우리의 에너지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연민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입하는데, 이는 남을 돕는데 정확히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를 자신과 동일시해서 같이 훌쩍거리지 말고, 거리를 두고 그를 진정시키고 지원하라는 것이다. 공감을 넘어서 연민의 마음을 훈련하라.

 

접촉의 힘으로

서로 다른 입장의 이해와 공존을 위해 ‘접촉’은 효과가 좋다.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에 의하면, 접촉은 더 많은 신뢰와 더 많은 연대, 더 많은 상호 친절을 낳으며,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접촉은 전염성이 있어서 사람들이 낯선 타인과 잘 어울리는 것을 보면 자신의 편견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접촉이 늘어날수록 타인에 대한 혐오감도 줄어든다.

학급은 1년 여정으로 떠나는 한 척의 배다. 다양한 관계의 역동으로 파도가 잔잔해질 일이 없는 험난한 항해의 길이다. 서로에 대한 반목과 갈등이 발생할 수 있지만, 다양성을 발견하도록 많은 접촉을 시도하자. 몸으로 접촉하는 활동, 느낌과 경험을 나누는 활동, 서로의 삶의 이야기가 들려지는 활동, 연대로 만들어 내는 그림 활동과 음악 활동들 ….

안타깝게도 코로나19에 의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접촉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혼밥, 혼영, 혼놀 등과 같이 나홀로족이 늘어나고 있는 문화도 사회적 연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비대면 시대가 확대되고 있지만 그럴수록 학교는 접촉과 사회적 연결을 위한 교육적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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